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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과의 대화

최형원

학계 : 최형원 (95학번)

  • 싱가폴 국립대학 조교수
  • 싱가폴국립연구소 (Agency for Science, Technology, and Research) 선임연구원
  • 전문분야 : 생물정보학

저는 지금 싱가폴 국립대학의 보건대학과 싱가폴의 과학기술원에 있는 분자생물학 연구소에서 생물통계과 생물정보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http://www.imcb.a-star.edu.sg/php/ittd-hc.php). 제 전공분야는 단백질과 대사체의 구조와 정량을 정확히 측정하고 그 정보를 이용해서 암과 당뇨같은 인간의 다양한 질병들의 발병 이유와 치료 기법을 가능하게 하는 분자들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흔히 말하는 학제간 연구의 표본입니다 –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수리와 계산, 그리고 어느 정도의 분자생물과 생화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요.

예상하시겠지만, 저는 서어서문학과를 나온 사람이 왜 이 일을 하고 있냐는 질문을 많이 듣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스페인어와 전혀 상관없는 연구를 하고 있지만, 사실 저에게 서어서문학과에서의 학부생활은 지금처럼 이렇게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주제를 찾도록 안목을 길러준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제가 다니던 1995년의 curriculum에서는 나름대로 학생들이 여유를 가지고 이 학과 저 학과를 다니면서 다른 전공의 1-2년차 과목들을 별 이유 없이도 시도해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liberal arts college를 다닌 느낌이네요.) 저는 아직도 한 겨울, 뜬금없이 언어철학 강의에 들어가서 잘 이해도 안되는Wittgenstein의 Tractatus를 펴놓고, 그 밑에서 확률통계론 숙제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인문대학 학생이 수학과같은 이공계 수업에 가면 항상 환영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학번이 가장 위에 있어서 항상 눈에 띕니다).

저도 왜 제가 그런 무모한 선택들을 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이것저것 시도해 보던 차에 찾았던 통계학 수업들과 경제학 수업들을 들으면서, “앞으로 살면서 이쪽 일을 하면 후회가 없겠구나”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물정보학을 결정한 것은 한참 뒤의 일입니다 (대학원 시절). 3학년때 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career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한동안 서문과에서 읽었던 스페인과 중남미의 소설들에 매료되어서 (저는 Delibes, Llosa, Roa Bastos fan 입니다), 문학이 아니라면 중남미 경제연구를 해볼까 생각도 했었고, 또 언뜻 청강으로 들었던, 생성문법의 archenemy인 계산 언어학 수업을 들으면서 Don Quixote를 natural language processing으로 처리해 1600년대의 사전을 조립해 볼까도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서울대학교 이후 7-8년의 여정을 더 겪으면서 어쨌든 지금의 직업을 가지게 되었네요.

돌아보면 제가 서어서문학을 전공해서 지금의 직업에 기술적으로 직접 도움이 된 hard skill은 많이 없지만, 저의 학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기반인 soft skills, 특히 글을 쓰는 연습을 많이 하고 과제를 여러 사람들 앞에서 효과적으로 발표할 수 있는 능력, 연구과제를 스스로 찾아 갈수 있는 태도를 모두 서어서문학과 시절에 길렀다고 자신있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제 동료과 저를 비교해 볼때, 기술적인 면에서는 제가 부족할 지 모르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공동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는 남들에 비해 항상 자신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더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공동 연구자들이 늘어가야 하는 제 입장에서 볼때, 학부때 쌓아온 그 능력은 정말 중요한 재산입니다.

새로 전공을 시작하시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조언은, 인문학을 학부에서 전공으로 배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가 위에서 얘기한 생물학이나 수학, 통계학을 파나마 운하처럼 정해진 항로를 통해서 따라가는 배에 비유한다면, 한국에서 서어서문학을 전공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넓은 바다에 컴파스와 돛 없이 떠나는 기약없는 여정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수많은 선배들이 해 온것 처럼, 본인의 선택에 따라서 똑같은 program을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구현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경영학이나 법학, 의학같은 분야에서는 상상 할 수 없는 학문적이고 실용적인 자유입니다. 굳이 인문학을 미래의 직업으로 만들지 않더라도, 그 자유를 주체적으로 이용해서 학부생활을 미래의 발판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이 지금의 인문학을 가장 잘 배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친구들이 모두 정해진 교과목이나 학점이 쉬운 과목을 선택하고, 또 가장 눈에 띄는 실용학문을 부전공으로 할때, 남들이 생각지 않는 컴퓨터 공학이나, 또는 인문대 안에조차 있는 계산언어학을 시도해 보세요. 학점을 못 받아도 여러분이 그런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기회는 아마 앞으로의 긴 인생에서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수많은 경쟁 속에서 사는 junior faculty이고, 아직도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배워가는 단계에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얼만전에 한국을 찾아왔던 코미디언 Conan O’Brien이 Late Show에서 해고 당하면서 마지막 방송에서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Be kind, work hard, then amazing things will happen.